여름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여름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를 쉽게 흔들고
무성한 이파리마다 박혀 있는
투명한 저 화살들은 결코
쉽게 날아온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던
겨울의 황량함과 우리의 머리맡을
어지러이 밟고 지나가던
낡은 바람소리에 숨을 죽이며
설원에 뿌려진 모를 몇 줌의
씨앗처럼 엎드려 있던 우리의 봄
봄에 겨울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흔들어도 한 모금의 파도소리도 없는
이 숲의 도시에 여름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가로수는 이열횡대로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외곽의 방어는 완벽했었고
우리는 안심했다 회색의 벙커 속에서
잠을 잤다 곰처럼


새벽마다 근교의 섬들은 일어나
수천 수만의 깃발을 흔들고
은밀하게 정렬하는 수평선에
더러는 손을 베이고
엎드린 가슴에 무섭도록 돋아나던 햇살에
찔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한 점의 고통도
느낄 수 없는 이 도시에
죽어도 여름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한없이 부드럽고 조용한
바람의 그늘에서
시간은 근래 보기 드문 해일을 기다린다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한 뼘의 땅마저
위태롭게 할 폭우를
기다린다 태풍의 방패를 들고,
폭염의 투구를 쓰고
뜨겁고 얇은 양철지붕 위로
여름은 힘차게 뛰어오고 있다



이제는 아픔에 대하여 아파해야 한다
어설픈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가로수를 흔들어 방어를 확인하고
새로운 방패와 창을 준비해야 한다
헐은 살점은 씻어내고
충분한 수혈을 받아야 한다
겨울은 기억해야 하고
봄은 반성해야 한다
지혜의 방풍림으로 외곽을 쌓고
이성의 방파제를 손질하고
가장 낮은 곳으로
생각의 물골을 뚫어야 한다
흔들면 파도소리 하는
튼튼한 가슴도 만들어야 한다
내 땅에 내가 굳게 딛고 서서
이 썰물과 개펄의 도시와
여름을 향하여 선언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름이 가장 치열한 날
회색의 벙커를 나와
빛나는 가을을 다시 준비해야 한다